Naver에 대한 이해도 정도와 참신한 신규사업 제안을 보는 2007 하계 인턴쉽 중간과제 이때 발표로 중간과제 우수상(2등/10여개팀)을 받았다.
Naver는 사람들이 원하는 똑똑한 Brain이다! 라는 문구와( Naver = Brain ) 그에 걸맞은 신규 서비스를 제안해 보았다. ^-^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때 야심 차게 제안한 신규서비스는 이미 구글에서 비슷하게 준비 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다른 팀들이 제시한 대부분의 신규서비스들은 Naver와 Hangame이 이미 한 번씩 검토 해보았거나, 시장성이 없는 서비스들로, 평가자들이 우리들의 신규 아이디어를 원했다기 보다는 우리가 Naver와 Hangame, 즉 NHN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지 알아 보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제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고, 우리 팀만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넣어 보았다. 웹2.0에 걸맞은 사용자 자동 패턴 분석 로그인 포털 시스템! 사용자가 원하는 경우에 로그인으로 검색하고 한 모든 패턴들을 수집해 자동화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자동 패턴을 맞추어 그 사용자의 기호에 걸맞은 뉴스들과 쇼핑 품목, 블로그, 자료 등 을 우선적으로 보여주는 시스템이다. 물론 수익성까지 고려를 해서 만들었다. 나중에 내가 구현해 보고 싶다.
세계기업현장실습에서 우리 조는 '중진국 말레이시아의 투자환경 및 진출전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 조 주제와 관련된 방문기업으로는 포스코 생산법인, 삼성전자 생산법인, LG전자 판매법인을 방문하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또한 말레이시아를 다른 기업들을 방문하고 문화를 경험하면서 말레이시아 시장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매우 알찬 보고서라 공유하면 좋겠지만 학교의 허락이 필요한 부분이라 간단히 그 의미만을 공유하도록 하겠다.
<삼성물산에서 시공한 쿠알라룸푸르 쌍둥이 빌딩>
우선 첫 번째 의미로 중진국으로서 저렴한 노동력을 들 수 있겠다. 말레이시아는 2007년 기준 1인당 경상 GDP가 US$ 6,871로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저렴한 노동력은 동남아 생산기지 구축에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주력산업이 서비스와 제조업으로 그에 따른 숙련된 노동자들도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근처 동남아 노동자들을 쉽게 들여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저렴한 노동력의 효과를 더 극대화 시킬 수 있다.(이 노동자들은 영어로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대부분 인도네시아에서 온 말레이 계로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두 번째 의미는 정치적인 안정을 들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여권연합(BN-Barisan Nasional)이라는 14개 정당들이 모여 연합체의 형태로 구성된 거대 여당이 존재한다. 이 여당은 인종 및 민족 간의 문제들을 적절히 조율하며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제 1 야당인 PAS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으로 야당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 사실상 힘든 상황이다. 최근의 선거에서 BN이 3 분의 2 이상의 국회의원 의석을 차지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아직도 BN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하고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안정적인 정치기반을 바탕으로 큰 정책의 변화 없이 여러 기업들과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인프라 와 정부지원 및 언어 이다. 말레이시아는 마하티르 전 총리의 때부터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도로와 철도 환경, 말레이시아 무역의 95%를 차지하는 잘 갖추어진 항만, 한국 인천국제공항에 이어 아시아 2위 규모를 자랑하며 연간 약 2500만 명의 승객과 65만 톤의 화물을 수용할 수 있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등 각종 인프라 확보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많은 해외 제조업체에게 물류적인 측면에서 많은 이점을 가져다 준다. 정부도 말레이시아 현지에 생산기지를 운영하는 제조업체에게 막대한 세제감면과 기타 여러 혜택을 안겨주고 있다. 또한 언어의 경우에도 말레이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매우 유리하고 이런 측면은 노동자의 경우에도 적용이 되어 인력관리에 효율성이 높다.
네 번째는 이슬람문화권 진출에 대한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이 가장 크게 다가올 수 있는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보통 이슬람문화권의 나라로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많다.(이슬람 문화와 율법) 그 제약을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인들이 제품을 생산하면서 원천적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산된 'Made in Malaysia' 제품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물건이 된다. 또한 제조업체는 이슬람문화권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도 감당할 수 있다.
이렇게 말레이시아는 제조기업에게 진출을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국가인 것 같다. 말레이시아에서 1주일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많은 기업을 방문하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교의 공식프로그램으로 방문하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지만 알짜배기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고, 앞으로 Global Leader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Thank you.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 센트씩 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예를 든다면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 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 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gonna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 중 어떤 한 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 봅니다.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 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뿐 입니다.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 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왜냐구요?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해줄 수 있는 것을 단 몇 달 안에 다 해치워야 된단 말이었고,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m fine now.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 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 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ed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도그마(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이번에 세기현을 통해 내게 다가왔던 기회가 있었다. 아직 그 길이 내가 놓쳐버린 기회인지 내 비전과는 다른 유혹의 길인지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세계기업현장 실습 2일차 동문선배님들과의 저녁식사 때부터 시작된다. 싱가포르에 방문하기 전에 싱가포르에 계신 연세대학교 동문회 선배님들이 우리들이 오시는 소식을 듣고 식사를 대접해 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싱가포르 도착 바로 다음 날 저녁에 선배님들께서 대접해 주시는 맛있는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식당은 바로 고급 중식당 이였는데, 福과 연관된 이 집의 메인 코스로 먹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동문 선배님들과 같이 먹게 된 고급 중식당
福을 기원하는 식전 기념 행사
식사 때 처음 나온 애피타이저는 굉장히 특이했다. 아직 섞이지 않은 샐러드 같은 음식이 나왔는데 이 샐러드는 손님들이 복을 기원하면서 소리를 질러가면서 최대한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가 떨어트리면서 섞어야 했다. 소리를 더 크게 지를 수록, 더 높게 던질 수록 福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완전 높게 던졌다..^^V Anyway, 선배님들의 좋은 조언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내가 컴퓨터공학과 경영학을 같이 전공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게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같다.
동문 선배님의 부인께서 씨티은행 싱가포르 지점에 계시는데 그 부서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면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을 인턴으로 모집하고 있다고 했다. 아시아 지역 금융허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그것도 세계 최고의 금융회사인 CitiBank에서의 인턴 경험. 그 경험은 그 당시 나에게 엄청난 기회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비전을 가지고 있는 분야와 전혀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인턴에 지원하겠다는 확답은 드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선배님께 연락처를 받아두고 다음 날 연락을 드렸을 때, 경험상 인터뷰라도 보라고 권해주셔서 결국 이력서를 작성해 보내드리기로 했다. 영문 이력서가 없는 상황에서 영어가 부족한 내가 잘 작성할 수 있을 까 걱정을 했지만, 역시 우리 GMT에는 영어 원어민 들이 많지 않은가?ㅋㅋ Glenn이 내가 대충 말만 만들어 놓은 것을 고급표현으로 잘 바꿔주었다. ^^; 하지만 호텔 인터넷이 되지 않아 결국 그날 보내드리지 못했고, 다음 날 호텔을 나가기 전에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고, HP Asia Headquarter 공식방문 일정이 빡빡해 결국 이력서를 보내지 못했다.
HP Asia Headquarter는 미래에 HP가 이끌어 나아갈 최첨단 제품들을 구현해 놓은 체험실을 시작으로 공식일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력서를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결국 가이드님께 부탁 드려서 핸드폰을 빌려 CitiBank에 계신 선배님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HP Singapore Asia Headquarter 건물 1층
전화를 드려보니 연락이 오지 않아서 안 하기로 결심한 줄 알았다고 하셨다. 또한, 어제 인턴 면접을 보러 온 사람과 조건이 맞아서 부서에서 합의를 보고 합격 통보를 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내 길이 아니겠구나 생각하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통화를 끊었다. ^^
그렇게 체념을 하고 HP 관련 인터뷰 준비를 하려는 데 다시 가이드님이 불러서 다시 CitiBank에서 연락이 왔다고 알려주셨다. 전화를 받아보니 지금이라도 좋으니,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 보러 올 수 있냐고 물어 보셨다. 그래서 교수님과 팀원들께 사정을 말씀 드리고, HP 직원 분의 노트북을 빌려 이력서를 보내고, 여기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CitiBank가 있는 SunTeck 빌딩으로 이동했다. 이동해 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만약 합격을 해도 내가 인턴을 해야 하는 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도착을 하고 어렵사리 씨티은행 기업금융 담당부서로 면접을 보러 들어갔다. 다행히 선배님께서 많은 절차를 간단히 생략해 주셔서 바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중국계 싱가포르 사람들 2명에게 면접을 봤는데 이력서에 있는 내용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셨고, 짧은 영어로 대답하느라고 힘들었다. ㅠ.ㅠ
그렇게 긴장이 흐르던 면접이 끝내고, 합격하면 하게 될 업무 설명도 다 듣고 씨티은행 아시아 총 외환거래부서에 대한 간단한 견학도 마치고(엄청난 규모이다 *.*) 선배님과 같이 식사하러 내려왔다. 선배님 말씀이 인사담당자께서 내가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기존에 합격했던 친구를 빼고 나를 채용하겠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그것은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기 보다는 기존 합격한 사람들이나 싱가포르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회사 인턴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Full-time으로 일할 수 있고 오래 일할 수 있는 내가 더 좋은 점수를 받을 것 같다. ^^;, 어쨌든 자신감 만땅 충전!ㅋㅋ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이와 같은 Global Economic Crisis에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포르의 그것도 CitiBank Asia Headquater에서 일할 수 있다니 참으로 끌리는 제안 이였다.
내가 어려워하는 영어에 대한 부분도 좀 더 자유롭게 해결 할 수 있으면서, 금융에 관련된 부분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 처음에는 정말 놓치기 싫었다. 게다가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배울 것이 너무 많은 나라 싱가포르에서의 생활이 기대되기도 하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인턴이고 Full-time 근무라 제안된 보수도 많이 높았고 그래서 더 혹하기도 했다.
대답을 주말까지 줘야 한다고 하셔서 이틀 동안 기도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해보았다. 과연 지금 이 시기에 이 기회를 잡아야 하는지. 이 길이 과연 내 비전에 길에 맞는 지.. 많은 시간 동안 고민을 하며 객관적인 장 단점을 다 적어 놓고, 기도를 하고, 멘토님 3분께 연락을 드렸다. 아버지, 여자친구 아버님, 목사님. 모두 다 아버지 같으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분들의 조언 속에 생각을 정리 하고 결단을 내렸다.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너무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내가 그 동안 부족하게 생각했던 영어실력과 외국 경험 등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 6개월 간의 싱가포르 시티은행 인턴이라는 큰 Name Value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미래의 비전과 너무 다른 길이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2개월의 NHN 인턴 경험을 넘어서는 내가 바라보는 웹 산업과는 전혀 다른 6개월의 사회경험이 내 미래의 비전에 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았다. 지금 이 금융분야로 가게 된다면 결국 금융분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년도는 매우 중요한 일들이 많은 시기로 내년까지 계획되어 있는 수 많은 중요한 일들이 다 미뤄져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너무 좋으신 선배님들께서 마련해주신 놓치기 힘든 기회였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내 비전의 길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주님의 길을 확신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내 비전에 반대되는 여러 유혹이 찾아 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비전에 길을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뜻을 확신한다!!
GMT는 Global Management Track의 약자로1996년도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서 세계적인 리더를 길러내자는 취지 하에 만들어진 경영학과 최초의 공식인증학회이다. 출범 당시 6개 분과의 대표교수님들과 6개의 글로벌 기업들의 후원 하에 만들어 졌고, 지금 현재 500여명의 달하는 전세계 곳곳과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하고 계시는 Alumni Network를 가지고 있다.
GMT는 서류, 회장단, Case Presentation(Alumni), Discussion(Alumni), 최종으로 교수님에게 까지 5차에 달하는 까다로운 Recruiting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합격하여 들어오게 되면 2학기에 걸친 다양한 Session을 통해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특히 겨울방학 때 실제 해외경영현장에 나가서 세계 속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어떻게 경영을 하고 있는지 조사해보고 기업사례를 만드는 세계기업현장실습 프로그램도 있고, 여름방학 때 Biz-Asia를 통해 한국의 연세대학교 GMT학회와 일본 게이오 대학, 중국 북경대학, 싱가포르의 국립대학의 경영학회와 같이 아시아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고 우애를 다질 수 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세계기업현장실습 프로그램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다녀왔다. 절반의 비용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서 지원을 해주고 학교의 이름을 걸고 공식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낭여행과 다른 매우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래는 이번에 다녀왔던 세계기업현장실습의 스케줄이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다녀왔던 경험과 느꼈던 수 많은 정보들을 블로그를 통해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마침내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주주총회 처럼, 지금까지의 실적보고와 앞으로 3년간의 회사를 이끌어 나갈 계획에 대해 발표를 해야 했다. 예선전 SPI 지수가 앞도적인 우리 팀이였지만, SPI 지수가 불과 10% 밖에 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방심할 수 없었다. 결승전을 앞두고 우리 GMTians 팀은 완벽한 발표자료를 위해 몇 일동안의 e-Strat 의견교화 모임, 10시간에 이르는 연속 PPT 만들기 합숙 과정, 당일날 6시간의 수정과 지하철 이동중에서의 임시 브리핑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아래 사진에서 우리 GMTians 팀의 준비과정의 열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기자단들 같다ㅋ
우리는 12분 간의 발표를 6분씩 나눠서 내가 지난 2년 간의 실적보고를 주주들에게(심사위원) 하고, 앞으로의 3년간의 계획에 대해서 규현이형이 보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예선전 순서대로 진행을 했기 때문에, 1등이였던 우리가 먼저 시작하였다. 지금부터 발표자료에서 보여줄 수 있는 슬라이드 몇 부분만 공개 하도록 하겠다.
이 슬라이드는 우리 5명의 같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결과로 기초 자료를 만들어준 혜민이, 자료를 만들며 수준 높은 영어문장으로 바꿔준 윤선이, 디자인 측면을 담당한 보영이, 각종 센스를 온 갖 PPT에 담아주신 HERO 규현이형, 그리고 PPT Background 작업과 최종본 유지를 맡은 나로 서로 각자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히 하고, 서로 합심해서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차 주주총회 시작!
CEO의 인사말 - 규현이 형의 Sense!
지난 2년간의 실적보고
KEY FIGURES 중에서 가장 중요한 SPI 상승!
앞으로 3년간의 계획!
우리가 신규로 런칭하기로 한 브랜드 소개 - Pandora
Q & A
결과는..? 1등이였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와 우리 팀을 이끌어주신 결과가 아닐 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협력하며 집단지성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환상적인 Teamwork! 또한, 규현이형의 Magic Map(Top Secret!)ㅋㅋㅋ
1등팀에게 주어지는 트로피와 150만원 상당의 고가의 로레알 제품들(랑콤, 메이블린, 비오템, 케라스타즈 등이 포함)을 상품으로 주었다. 다들 고가에 성능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애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 ^^
GMTians 트로피와 함께 다 같이 한 컷!
트로피 들고 단독으로~ 샷!
로레알 심사위원 중 1분과 인사담당자 1분 ^^
GMT에서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GMT의 명성을 다시 한번 알릴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좋은 기회와 결과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나아가자! Passion & New Challenge!
LOreal e-strat Open/Academy Challenge 를 축소시킨 2008년 LOreal e-Strat Day Competition이 시작되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벌여지는 Open Challenge(세계 최대 경영전략 공모전)에서 R&D와 Capacity, Margin 등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의사결정 주제들을 제외하고, 마케팅 측면에 중점을 두고 단 2시간에 매 기수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순발력과 팀간의 팀워크을 보는 공모전이다. (참고로 Open Challenge의 경우에는 1기수 자료를 1주일간 분석해서 경기에 임한다. ^^;)
작년 Glocaleader라는 팀의 팀장을 맡아 수재인 연우와 수미와 함께 e-Strat episode 8 110개국 14426개 팀 중 한국 1위, 세계 13위(Undergraduate)의 성적을 차지했던 경험이 있지만, 이번 공모전의 성격은 완전 다르기 때문에 우리 팀이 성적 1등을 장담하기 힘든 입장이었다. 그때에 사용했던 핵심적인 전략들 전부가 이번 e-Strat Day Competition에서는 아예 수정이 불가능하였다.(2시간의 짧은 의사결정 때문에 시뮬레이션에서 모두 같은 조건으로 자동 결정하였다.) 이번 시뮬레이션의 핵심은 단 기간에 얼마나 효과적인 가격 결정과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 하고 소비자의 가치 트렌드를 찾아내느냐에 있었다. 즉, 경영전략 공모전(e-Strat Open/Academy)에서 마케팅 공모전(e-Strat Day)으로 성격 자체가 바뀌었고, 순간 판단력과 팀간의 긴밀한 호흡이 매우 중요할 것 같았다.
특히나, 경쟁대상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로 유력한 경영학과가 운영되고 있는 경영학과들, 그리고 그 학과 중에서 최고라고 여기어 지는 경영학회들만을 뽑아 자신의 경영학회의 명예를 걸고 하는 게임이라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참가했던 팀들은 아래와 같다.
대학교
경영학회 이름
팀 숫자
서울대학교
MCSA
1
연세대학교
MARP
1
연세대학교
GMT(우리 학회)
1
연세대학교
YMCG
2
성균관대학교
S-One
3
성균관대학교
SSC
2
고려대학교
EGI
1
고려대학교
MCC
2
고려대학교
FES
7
총합계
20개 팀
고려대 팀이 20개 팀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학회에서는 이번에 새롭게 들어온 신입(13.5기) 3명과 기존 Acting들 2명이 한 팀을 이루어 출전하였다. 하지만 나이로 보면 신입인 규현이형이 제일 나이가 많고, 그리고 나, 그리고 윤선. 이렇게 신입 3명이 나이가 더 많았다. ^^; (GMT 특성이다. 들어올 때, 나이는 절대 고려하지 않는다! 5차의 치열한 면접과 테스트만 있을 뿐..ㅋ) 그리고 기존 Acting인 보영이와 혜민이. ^^ 이렇게 5명으로 한 팀이 되어 출전하였다.
경기는 7일 1,2라운드(1라운드 : 6시 반-8시 반, 2라운드 : 8시반-10시반)
8일 3,4라운드(3라운드 : 6시 반-8시 반, 4라운드 : 8시반-10시반)
이렇게 진행되었다. 6시 반에 딱 ID를 나누어주고 그 때부터 2시간 안에 보고서를 다 분석하고, 무조건 8시 반까지 2시간 동안 의사결정을 끝내고 그 예산 분배한 우리 데이터를 Loreal e-strat Day 에 올려야 했다. 제한된 시간에 따라 우리 팀은 각자 분업을 하기로 했다. e-Strat에 대한 경험이 있는 내가 전체 총괄 지휘(별로 한 건 없다. 규현이 형이 많이 도와주셨다.)을 맡았고, 규현이형과 윤선이가 마케팅 부분, 보영이와 혜민이는 기존 자료들을 미리 만들어 놓은 툴에 집어 넣고 데이터를 기수별로 잘 볼 수 있게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나는 데이터가 나오면 바로 복사해 와서 나눠주고, 전에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분석과 전체 조율을 맡았다. 이 적절한 분업과 팀워크가 우리 팀의 압도적인 예선 1위의 성적을 가져온 것 같다. ^^
다음은 우리 1,2,3,4라운드 성적이다.
1라운드 : 5위/ 20위(전체)
- 브랜드 간의 새로운 포지셔닝 전략이 저가 브랜드는 대성공으로
중가 브랜드는 하향세로 만들었다. 절반의 성공.
2라운드 : 2위 / 20위(전체)
- 브랜드 리포지셔닝이 적절하게 들어 맞았다. 광고와 프로모션 전략도 상당히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3라운드 : 1위 / 20위(전체)
- 신제품 런칭이 우리 전략에 딱 들어맞게 성공을 거두었다.(Avoidance Strategy)
4라운드 : 1위 / 20위(전체)
- 신제품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기존 제품들의 방어전략이 성공
위와 같은 성공에 힘입어 예선 5위 까지 진출하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결승전(L'Oreal e-Strat Day Final)은 10월 13일(월) 로레알 코리아 본사(삼성동 아셈타워 31층 Versailles Room)에서 진행되게 된다.
위에는 진출하는 학회이름과 SPI가 나와있다. 8개가 출전한 고대 팀의 3개나 올라왔고, 1개 팀이었던 서울대팀은 아쉽게 떨어졌다. 결승전에서는 더 열심히 해보자!
Tips for CSR (Sustainable Index 올리는 방법)
예전에 진행했었던 다른 버전의 e-strat를 통해 얻었던 귀한 Tips를 또 나누려고 한다. 바로 CSR에 관련된 부분인데 로레알 e-Strat는 전체 15000 여 개의 팀순위를 정하는 주가지수에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부분)이 들어간다. 이 것은 Sustainable Index라는 지수로 따로 지수화되어 나오는데 이 지수는 Employee Programs(직원들 교육과 학생들 교육 프로그램 지원 등과 같은 장기적인 인력관리에 관련된 부분), Diversity & Equity Programs(직원들의 다양성(인종, 성 등)을 존중해 주는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 Environmental Programs(친환경적인 부분으로 재활용, 친환경소재 사용 등을 생산과 운송에 적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영향을 받아 올라간다. 이 부분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팁! 매뉴얼에서 보면 장기적으로 하는 게 가장 효과가 크다고 했다! 장기적으로 하면 단기간내에는 프로그램들이 끝마쳐질 때까지는 아무런 지수 변동이 없지만 그 프로그램들이 마쳐질 때는 투자금액 대비 엄청난 효과가 나타난다. 실제 기업에서 적용할 때와 똑같다.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돈을 투자해 CSR을 한다면 같은 금액이라도 단기적일 때보다 그 효과는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Sustainable Index를 올리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봐라! 단기적인 효과를 올리자고 하는 Program들이 아니다!
이전에 진행했던 L'Oreal E-strat Episode8 이 공모전. 다시 한번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진행했다. 뛰어난 팀원들을 만나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고 한국 1위는 하지 못했지만 같은 L'Oreal Family Group으로 참가했던 Ciel과 Westgate 동생들의 도움도 컸다.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셨다. 언젠가 한국이 세계최대 경영전략 공모전이라고 할 수 있는 e-strat 대회 결승전에서 우승할 그 날을 꿈꿔본다.
작년 11월에 시작하여 얼마 전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린 로레알 E-Start 대회에서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허대식 교수의 생산 및 운영관리 수업을 수강했던 12명의 학생들이 Glocaleader, Ciel, Westgate라는 팀을 구성하여 한국 대회에서 각각 1등, 3등,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Glocaleader의 경우에는 15,000 팀이 참가한 세계 대회에서 13등으로 선전하며 연세대학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로레알이 주최하는 E-Start 대회는 가상의 화장품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 시뮬레이션을 벌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총 125개국에서 학부와 MBA 학생들로 구성된 팀들이 경쟁을 시작해 1라운드에서 1,700개의 팀을 선발하여 5라운드까지 진행하게 되고 준결승에 300개 팀이 진출하게 된다. 이후 6라운드와 사업계획서를 통해 각 지역별로 1위 팀들이 모여 파리에서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 팀워크를 통한 국내 대회 우승
Glocaleader, Ciel, Westgate은 대회가 시작되고 3개월 동안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선의의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Glocaleader의 팀장인 정은혁씨(경영 05)는 "대회 규정상 정보는 많이 공유하지 못하였지만 서로를 독려하며 모두가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 협력하였다. 대회를 통해 현실과 비슷한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며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Glocaleader는 준결승에서 서울대 팀을 제치고 동아시아 지역 3위 그리고 국내 1위의 쾌거를 달성하였다. 시뮬레이션 점수에서는 서울대 팀에 약간 밀렸지만 사업계획서 부문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막판 역전을 일구어내었다. Glocaleader의 팀원들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데 아낌없이 조언을 해준 최순규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정은혁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 오늘은 국내 1위 내일은 세계 1위!
하지만 Glocaleader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통적 강호인 중국 팀들에 밀려 파리에서 열리는 결승전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1위와 2위는 모두 세계 랭킹에서도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중국 팀들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이 대회에 꾸준히 출전하였으며 그 동안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Glocaleader는 다음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그 때는 기필코 결승전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정보 교류도 중요
Glocaleader는 또 국제 공모전에 관한 정보 교류의 장을 열 것을 제안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공모전의 경우 인터넷 혹은 포스터를 통하여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적인 공모전의 경우 '아는 사람만 안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따라서 연말 혹은 학기말에 국제 공모전 수상자들과 공모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모아 설명회를 개최하면 유용할 것이라 밝혔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연세 경영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00개의 팀이 경쟁하는 준결승(Semi-final)이 끝났다. 준결승은 6라운드 가상 시뮬레이션 성적(50%)와 사업계획서(Business Plan)(50%)의 배점으로 점수가 매겨져서 각 Zone 별로 최고의 성적을 받은 1개의 팀이 결승에 진출하는 라운드이다. 전세계가 8개의 Zone으로 나누어 지고 그 중에 한 팀만 진출하게 되니 각 라운드 별로 경쟁도 치열하고 결승에 진출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깝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Zone 7)과 동남&서아시아 지역(Zone 8)의 경우 시뮬레이션 성적과 사업계획서 점수가 다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Zone 7과 Zone 8의 3~5등 정도의 성적이면 다른 Zone들의 1등보다 점수가 높은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역시 이번에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특히 Zone 8의 약진이 두드러 졌는데 아래 표1에서 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표1) Glocaleader팀 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팀의 분포(대학생)
대학생 팀
존1
존2
존3
존4
존5
존6
존7
존8
합계
팀 수
6
11
18
12
12
3
44
46
152
상위 팀 수
0
1
1
0
0
0
2
8
12
세계
13등
우리 팀은(Glocaleader)는 대학생 기준 세계 13등을 차지했다. 시작할 때 110개국에서 14426개의 팀이 참가한 것으로 보았을 때 0.1% 안에 드는 좋은 성적이다. 게다가 서울대 팀 Safari팀을 최종점수 0.1점 차이로 이기고 한국 1등을 차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Zone 7(동아시아 지역)에서는 3등을 차지하여(중국 1, 2등) 결승에 진출하는 것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Zone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위치가 세계 50위권 안에 드는 적도 거의 없었던 적을 감안해 보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조만간 한국 팀이 당당하게 Zone 7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결승에 진출하여 파리에서도 최종우승을 까지 하는 그 날을 꿈꾼다.
표2) Glocaleader팀 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팀의 분포(MBA)
MBA
존1
존2
존3
존4
존5
존6
존7
존8
합계
팀 수
12
8
2
8
7
12
7
12
68
상위 팀 수
0
3
0
3
0
1
1
1
9
준결승 부터는 MBA와 Undergraduate 가 확실하게 구분된다. 왜냐하면 각 Zone별로 MBA팀 1팀, Undergraduate(대학생)팀 1팀을 뽑기 때문이다. 결승도 따로 치루게 된다. MBA팀의 성적을 관찰하면서 느낀점은 확실히 보고서 점수가 평균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MBA과정을 하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보고서로 많은 점수를 받아 시뮬레이션의 낮은 점수를 가지고도 높은 점수 대의 팀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대학생 팀 처럼 Zone7과 8에 우수한 성적을 거둔 팀이 집중되는 것도 없어졌다. 오히려 Zone2(이베리아 반도 지역)과 Zone4(중동 지역) 팀들의 강세가 돋보였다. 우리 팀의 점수와 비교 했을 때 높은 성적을 받은 팀은 9개 팀, 하지만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등수를 합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표3) Glocaleader 준결승(Semi-final) 최종 성적
최종SPI
2232
Ranking(World)
세계 13위
BusinessPlan
70
(Zone 7)
동아시아 3위
종합점수
84.1
(South Korea)
한국 1위
※ SPI Round 6 점수
※ 준결승 최종종합점수(SPI + Business Plan)
이 점수가 우리 팀 Glocaleader의 최종 점수이다. 비록 결승에 진출하는 것은 실패 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또한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많은 도우심을 느꼈다. 최종결과도 딱 지금 나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신 것 같다. 오히려 지금 내 상황에서 결승 진출은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모전을 4개월간 준비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실제 화장품 기업이 하게 되는 의사결정의 핵심들을 다 구현해 놓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실제 기업의 수 많은 의사결정에 대해서 간접적이나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팀원들과의 팀워크, 소비자의 변화, 제품의 끊임없는 변화의 필요성, 사업계획서 작성 경험, 집단지성과 경쟁의 중요성, 전 세계 팀들과의 경쟁을 통해 얻게 되는 도전심, 자신감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배웠던 것 같다.
최고의 팀원인 오른팔 연우, 왼팔 수미. 모두 정말 수고가 많았다. 한명이 긍정적인 전망은 내 놓으면 한 명은 비관적인 전망을 내 놓고 여러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해주고, 수 많은 아이디어들과 핵심을 찌르는 전략들, 지금 결과를 만들었던 것 같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소기의 성과도 얻어가니 만큼 다음 목표를 향해 또 달려보자!!